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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과 부업

[출판초안] 정민제(정선비)

[정선비(정민제)의 이야기]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1. 공부를 잘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은 부모님이 사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으는 것이 유행이었다. 포켓몬스터 스티커는 '포켓몬빵'을 구매해야 얻을 수 있었다. 희귀한 포켓몬 스티커를 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에 위치한 마트를 가야 했다. 부모님은 주말에는 나와 함께 빵을 사러 가주셨고, 출장이 있으신 날에는 주변 마트에 들러 포켓몬빵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가장 많이 희소한 포켓몬 스티커가 있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호주 브리즈번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 전주에서 유학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는 그런 극소수 가정에서 태어났다. 축복이었다. 부모님은 연 1억이 드는 나의 교육비를 흔쾌히 투자했다. 처음에는 영어를 하지 못해 난민들과 함께 영어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덕분에 공부만 집중할 수 있었고, 영어실력은 나날이 향상되었다. 결국 나는 유명 사립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업은 대학 강의처럼 진행되었고, 교수진 모두 옥스퍼드 등 유명 대학 출신이었다. 학교 기숙사도 남달랐다.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사과, 배를 비롯한 과일들이 항시 진열되어 있었고, 저녁식사로는 뷔페나 스테이크가 제공되었다.

 

공부를 잘하면 행복해질 수 있구나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는 나날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도 가지 못한 호주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호주에서는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 예술까지 잘해야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성적으로 상을 받게 되면 블레이저 주머니에 해당 내용을 자수를 넣을 수 있었다. 자수를 넣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다. 아침이면 선생님들이 계신 교무실을 찾아가 궁금한 점들을 물었고, 체육시간에는 누구보다 공에 집중했다. 나는 조용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기에 선생님들한테는 물론 학생들한테도 인정받는 학생이 어느덧 되어 있었다.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니 한국학생들에 비해 내가 뒤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 나한테는 너무나 쉬었고, 배우는 내용들 역시 점점 쉬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국이 그리웠다. 호주라는 타지에서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벼운 감기여도 손쉽게 갈 수 있는 병원이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제공될 수 있는 한국이 그리웠다. 무엇보다 가족이 그리웠다.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많은 좌절과 시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어만 잘하면 편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외국어고등학교를 번번이 떨어졌다. ‘외고열풍으로 인해 공부를 잘하는 모든 학생이 외고에 들어오려 했던 탓이 컸다. 2명을 뽑는 편입시험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시험에 응시했다. 쉬운 수학문제만 풀다가 갑작스럽게 고난도 수학문제를 풀려니 매번 시험을 치룰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서울권 외국어고등학교 입학을 꿈꿨지만, 스스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전주가 아닌 타지에서 공부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외고입학을 포기했다.

 

나는 1년 뒤늦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년을 꿇었다. 남보다 늦었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본 첫 모의고사에서 나는 전체 530여 명되는 학생 중 450등 정도를 했다. 꼴등이 아니었던 이유는 시험과목 중 영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가장 문제는 수학이었다. 점심시간마다 수학선생님을 찾아 질문했고, 쉬는 시간마다 수학문제를 풀었다. 나는 다음 시험에서 반에서 1등을 할 수 있었고, 당시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특별보충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나는 삼수를 했다. 나는 이른바 내신형인재에 가까웠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요구하는 사고력과 응용력이 부족했다. 큰 시험에 약했다. 모의고사 때는 기대했던 점수가 나왔지만, 유독 수능시험에서는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했다. 삼수 때 역시 내가 기대했던 결과를 받지 못하고, 점수에 맞춰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운 좋게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에 왔지만, 항상 예상치 못한 대학에 입학해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또래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에 들어갔는데,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학교 과잠도 열등감에 단 한 번 입고 옷장에 처박아 두었다. 수시전형으로 누군가가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2. 공부를 넘어 나만의 길을 개척해보자

 

"돈 걱정은 절대 하지 마라. 언제든 필요하면 이야기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부모님은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용돈을 주셨다. 특히 공부와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삼수를 하면서까지 공부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다. 공부를 잘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행복해지지 않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토익 990점을 취득하고, 학점을 4.0 이상 받았지만,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나는 당시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던 대학 신입생이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LG드림챌린저라는 대외활동에 멘티로 참가했다. LG드림챌린저는 신입생들이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23일 간 합숙하는 대외활동이다. 그곳에서 윤승철 멘토를 만났다. 형은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탐사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2살 정도 많지만 형은 이미 자신만의 길을 찾아 걷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승철이형을 통해 나만의 길은 내가 직접 개척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진지하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보자라는 행동력을 기르기 시작했다.

 

군입대 전까지, 수많은 도전을 시작했다. 이것저것 경험을 해봐야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 것 같았다. , 고등학교 때 1년을 꿇고, 삼수를 하면서 나는 또래보다 3년이라는 시간을 뒤늦게 살고 있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3년이라는 시간을 극복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세계경제총회 리에종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제회의에서 운영요원 경험을 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철학책과 함께 많은 책들을 이 기간에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다. , 영어통역병 지원을 통해 또래보다 늦은 시간을 벌기 위해 통번역공부를 열심히 했다. 결국 나는

의무경찰 어학특기병으로 최종 선발되었다.

 

3. 나의 사고를 뒤바꿔버린 군생활

 

논산훈련소로 군입대를 했다. 모두가 빡빡 머리를 밀려서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살아온 환경이 모두 달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이트클럽에서 일을 하다 들어온 친구는 물론, 7년 동안 아이돌 연습생으로 살아왔던 형이 있는가 하면, 초등학교 교사도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사회에서 각자 뭘 하고 있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누구나 나처럼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렇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광경찰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관광경찰대는 의무경찰이라면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 하는 부대였다. 관광객을 상대로 서울 주요 관광지에서 군복무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역시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외국어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었던 부대였던 만큼 유학생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재벌 3세 또는 4세였고, 유명기업의 이사급 또는 고위 공무원 자제였다. 휴가를 나갈 때마다 운전기사가 부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같은 빡빡머리였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잤지만 이들은 분명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관광경찰대에서의 근무는 21조로 이뤄졌다. 선임과 함께 홍대근무를 하던 중 컵케이크 가게를 지나면서 선임이 한 마디 툭 던졌다. “한국에는 맛있는 컵케이크집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미국 유명 컵케이크집의 로열티를 사서 홍대, 명동 곳곳에 프랜차이즈 매장을 열면 어떨까?” 선임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압도적인 생각의 크기에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사업이라고 하면 단순히 커피전문점과 같은 자영업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저 취업 또는 전문직/공무원이 되는 것이 전부라고만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나는 군대 선임과 후임들을 통해 크게 생각하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스케일 사고법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취업이 꿈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자신을 위해 일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자영업이 아닌 비즈니스를 생각했고,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시간을 사려고 했다. 자신만의 시스템을 고민했고, 항상 미래를 예측하려는 습관이 있었다. 일례로 한 선임은 인스타그램이 널리 알려지기 전인데도 책은 이제 읽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도구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생각하는 법과 더불어 나는 다양한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자진흥회 2, 관광통역안내사, 호텔서비스사,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2, ITQ, 토익, 텝스, 오픽시험을 위해 군복무기간동안 틈틈이 공부했다. 평균 1달에 1번 자격시험을 보았다. 당시 내 별명은 자격증에 미친 대원이었다. 내가 자격증에 집중했던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의무경찰은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의 자기개발을 하면 외출 또는 휴가를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이 때 부여받은 외출 또는 휴가를 통해 서점에 들러 다음 자격증 취득을 위한 참고서적을 구입하거나 자격시험을 보러 갈 수 있었다. 둘째, 다양한 영역을 빠르게 접하는데 자격증 공부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공부하고 그에 대한 보상인 자격증도 빠르게 받아볼 수 있어서 자격증공부가 나와 잘 맞았다. 셋째, 시시각각 바뀌는 부대 분위기로 인해 연속적으로 공부하기 힘들었기에 자격증 공부를 했었다. 개성이 강한 부대원들이 많다보니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자격증 공부는 공부의 맥이 잠깐 끊어져도 곧바로 복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경제적 자유를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부모님의 경제적인 지원덕분에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그러나 군 생활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커버린 내 꿈의 크기로 인해 부모님의 경제적 한계를 인지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부모님에게도 정년퇴직일이 들이 닥칠 것이고 나 역시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군대 전역하기 직전에는 이미 꿈의 그릇이 넘나도 커져버렸다. 1달에 한 번 받는 월급으로는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해서 받는 월급을 역산해보니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지 못살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창업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4. 무작정 시작한 창업 그리고 사람관계의 두려움

 

전역 후, 곧바로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명동에서 근무할 때 한 여름, 관광객들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울퉁불퉁한 명동 거리를 땀을 비올 듯이 흘리며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물품보관소가 지하철이나 지하보도 내에 위치해 있지만, 관광객들은 보관소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하거나 찾는다 하더라도 캐리어의 크기가 보관함과 맞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불편함을 토대로 사업아이템을 구체화했다. ‘관광객을 위한 공간공유 짐보관 서비스를 고안했다. 관광객들은 관광지 내 카페, 음식점 등의 유휴공간에 짐을 보관하고, 카페, 음식점들은 고객 유인효화와 함께 추가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아이템이었다.

 

---- 아직 미완성입니다. ------